자동차 정보 이슈 - 브랜드 쉐보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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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정보 이슈 - 브랜드 쉐보레 이야기

쉐보레 블레이저

콜벳가 블레 이저아 같은 자동차들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활약하던 카리스마가 넘쳤던 레이스 드라이버 중 1명의 이름을 새겨져 있다. 루이 조제프는 1000만 대 이상 판매된 제품들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디트로이트의 역동적인 자동차 산업이 아니고 경주 트랙에 남아 있다.

루이 조제프

 루이 조제프 셰브럴레이는 1878년 크리스마스에 스위스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프랑스 부르고뉴로 이주한 셰브럴레이 가문은 부유함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루이 셰브럴레이는 아직 소년이었을 때, 포도원에서 일을 찾아야 했고 이내 아버지로부터 배운 기계 공적 재능을 발휘했다. 포도주를 한통에서 다른 통으로 옮기는 디캔팅 과정의 속도를 높여주는 펌프를 설계해낸 것이다. 펌프는 멋지게 작동했다. 루이가 당시로서는 갓 발명된 기계였던 자동차와 관련된 일을 시작했을 때 그는 120년 후 생산되는 자동차 16 대중 1대에 자신의 성이 쓰이리라고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10대 소년이 된 루이 셰브럴레이는 자전거 수리점의 수습공이 됐다. 일은 그와 잘 맞았고, 그는 곧 자전거의 기어 구조를 개선하는 데에 몰두하게 됐다. 18세가 된 그는 파리의 모흐 자동차 회사에서 잠시 동안 일을 한 후 1900년 운전사 겸 기술자로서 미래를 찾아 캐나다로 떠났다. 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자동차 회사였던 프랑스 드 디옹-부통의 기술자로 고용돼 뉴욕으로 다시금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905년 피아트에서도 비슷한 일을 하게 됐다. 셰브럴레이는 항상 자전거 경주를 좋아했고, 그때부터 모터스포츠에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는 1.6킬로 미터 구간을 52.8초로 주파하는 기록을 세움으로써 국제 기록을 갈아치우고 지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서킷에서 명사가 됐다. 오래지 않아 그는 뷰익의 레이싱 카 드라이버로 고용됐고, 1908년에 제너럴 모터스(GM)를 설립한 윌리엄 듀런트를 만났다. 과도함 야심 때문에 1910년에 주주들에 의해 GM에서 축출된 듀런트는 루이 셰브럴레이에게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데 필요한 모험가적 동반자의 자질을 발견했다. 거물이 되고 싶었던 셰브럴레이는 단번에 오케이를 했다. 두 사람은 1911년에 쉐보레 자동차 회사를 공동 창립했고, 1년 뒤에 4.9리터 6기 통 엔진을 얹은 5인승 투어링 카를 선보였다. 클래식 식스라고 불린 그 차는 도로 사정이 좋으면 최대 시속 105킬로미터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2,510달러 가격표가 붙은 그 차는 괄목할 만한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협력관계는 곧 쓰라린 결말을 맞았다. 셰브럴레이는 모터스포츠에서 활약할 고품질의 자동차를 만들고 싶었지만 듀런트는 미국의 대중차 시장을 휠쓸 수 있는 저가차를 원했다. 1913년에 듀런트는 셰브럴레이의 지분을 인수했다. 쉐보레는 이후 듀런트가 GM과 인수협상을 벌여 경영권을 다시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빠르게 성장했다. 쉐보레는 더욱 강력해져, 1927년에는 처음으로 100만 대 이상의 승용차를 판매하며 포드를 2위로 밀어내고 미국 최다 판매 자동차 메이커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했다.